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튜어트 왕조 (문단 편집) == 상세 == 스튜어트 가문의 시조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의 [[귀족]] 출신으로 11세기 [[노르만 왕조]]의 시조인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잉글랜드 침략]] 때 [[브리튼 섬]]으로 건너온 앨런 피츠플래드(플래드의 아들 앨런)였다. 앨런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에 의해 [[영지(역사)|영지]]를 수여받아 잉글랜드의 귀족이 되었다. [[11세기]] 브르타뉴는 인접한 [[노르망디 공국|노르망디]]와의 교류가 잦았고, 일부 귀족들이[* 주로 영지를 상속받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었다.] 노르만 침공에서 공을 세워 영지를 수여받기도 했는데 앨런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렇듯 앨런의 후손들은 잉글랜드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나, 12세기 [[스티븐]] 왕과 마틸다 공주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무정부시대]]) 시기에 [[모드 황후|마틸다]]를 지지했다가 스티븐이 1차적으로 승리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스코틀랜드 왕국|스코틀랜드]]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후 스코틀랜드 던켈드 왕조의 국왕 [[데이비드 1세]]와 친분을 맺은 앨런의 증손자 월터(Walter)가 스코틀랜드의 세습 최고시종장[* Lord High Steward. 높은 영예를 갖는 명예직이다.]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스튜어트 [[가문]]이 성립하게 되었다.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유래는 월터가 수여받은 직위에서 따 왔다. 스튜어트 가문은 최종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정착했고, [[왕실]]과의 혈연으로 유력 귀족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스튜어트 가문은 원래 왕실의 [[친척]]이긴 해도 왕위계승서열이 그리 높지는 않았는데, 더 높은 [[순위]]의 왕위계승권자들이 연달아 후사가 끊기거나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유력한 국왕 [[후보]]로 올라서게 되었다. 독립영웅이자 브루스 왕조의 시조였던 [[로버트 1세]]의 뒤를 이은 [[데이비드 2세]]가 1371년 끝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로버트 1세의 외손자이자 월터 스튜어트의 아들이었던 로버트 스튜어트가 [[로버트 2세]][* 월터 스튜어트가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 브루스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었다.]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스튜어트 왕조가 개창되었다.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와는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숙적인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유대관계를 맺어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를 [[견제]]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그의 [[친구]]이자 살해당했던 뱅코우가 바로 그 [[시조]]였다. 다만 그의 후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을 받는 부분은 셰익스피어 시대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를 시작으로 하는 스튜어트 왕가를 띄워주기 위한 작가의 가필로 보인다.] 그 뒤로 [[로버트 3세]], [[제임스 1세]], [[제임스 2세]], [[제임스 3세]],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까지 부자계승으로 이어졌다. 이 도중에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의 장녀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에게 시집가서 제임스 5세를 낳았다. 모후를 통해 튜더 왕가의 피가 흐르는 제임스 5세는 프랑스의 기즈 가문 출신인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해 [[메리 1세(스코틀랜드)|메리 1세]]를 낳았다. 그러나 제임스 5세가 메리가 태어난지 불과 6일 뒤에 사망하면서, 메리는 고작 신생아 때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1558년 메리는 훗날 [[프랑수아 2세]]가 되는 프랑수아 [[왕세자]]와 결혼했고, 이로써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군연합|결합]]이 완성되는 듯 했다. 하지만 유달리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8개월 만인 1560년 12월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요절]]했고, 프랑수아 2세와 사별한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되면서 두 나라의 동군연합은 무산되었다. 메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유명하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알려진 이야기는 현대에는 [[엘리자베스 1세]]나 [[성공회]] 교도의 입장만을 대변한다며 비판을 받는 관점이고 의외로 본토에선 메리에게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대중적인 차원에서 메리의 비극적인 [[삶]]과 화려한 개인사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 거지 역사적으로 진지하게 평가하자면 본토인 스코틀랜드에서 오히려 잉글랜드보다 더 악평가를 하면 악평가를 했지 좋게 봐주진 않는다. 실제로 메리 1세의 생애와 행적을 보면 비운의 군주는 커녕 스스로 분란을 자초한 [[암군]]에 가깝다. 차라리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남의 나라의 문제 많은 비극의 여군주" 수준으로 담담하게 볼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 본토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문화적, 가치관적 차이도 굉장히 컸고, 실질적으로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인 주제에 종교적 문제로 사사건건 충돌했으며 거듭된 실정으로 인하여 대내외적 정치적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메리 1세(스코틀랜드)|메리 1세]] 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핵심 계층은 예전부터 약했던 왕실에서 클랜 대귀족-[[개신교]] [[성직자]]-자치 도시민 중심의 [[과두정]]으로 확실하게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수아 2세와 사별한 이후 메리는 친족이자 4세 연하의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단리 경은 스튜어트 왕가의 [[분가]]인 "단리의 스튜어트 가문"의 [[당주]]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마가렛 더글라스의 아들이었다. 마가렛 더글라스는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트 더글라스와 [[마거릿 튜더]]의 [[딸]]로 이 마거릿 튜더는 위에서 나온 제임스 4세의 왕비로 메리의 [[할머니]]인 그 사람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1513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가 사망한 후 아치볼트 더글라스와 [[재혼]]했고, 1527년 아치볼트 더글라스가 사망하자 다시 메스번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했다. 그러니까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어머니 마가렛 더글라스는 메리 1세의 아버지 제임스 5세의 이부 여동생으로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는 결국 메리 1세와는 [[사촌]]지간이 되었다. 즉 단리 경 역시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튜더 왕가의 혈족은 거의 남지 않았고, 헨리 8세의 핏줄은 명맥이 끊길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조인 헨리 7세의 혈통에서 계승자를 찾아야할 처지라서 단리 경은 잉글랜드 왕위 유력 계승자였다. 메리 1세는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궁정에서 자란 데다가 외가인 기즈 가문은 프랑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골수 [[가톨릭]]이어서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이에 따라 당연히 친프랑스 성향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를 찬탈자로 보며 자신을 적법한 잉글랜드 계승자로 주장했다. 당연히 잉글랜드에선 두 사람의 결혼을 처음엔 반대했다. 튜더 왕가와 스튜어트 왕가 후손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이 있는 두 사람의 결합은 당연히 정략적이었고, 신하들의 권유로 한 것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애정은 없었으나 1566년 6월에 제임스 6세를 낳았다. 한편 스튜어트 집안끼리의 결혼이었지만 왕조의 이름이 살짝 바뀌었다. 단리 경의 가문이 비록 스튜어트 혈족이었지만 스튜어트 가문이 스코틀랜드 왕가가 되기 전에 분가한 집안이라 친가로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단리 경의 증조모인 엘리자베스 해밀턴이 제임스 2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부계로도 어느 정도 가까운 혈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단리의 가문은 한때 조상이 프랑스 궁정에 머물 때 철자를 Stuart 라 고쳐서 기존 스코틀랜드 왕실 이름(Stewart)과 좀 달랐다. 따라서 단리 경과 메리 1세의 아들인 제임스 6세[* 이후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한다.] 즉위 이후 스튜어트 왕가는 [[가문]]의 철자를 Stuart로 고쳤다. 단리 경은 스튜어트 왕가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King Consort 직위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메리 1세가 [[이탈리아]] 출신 남자 시종 다비드 리치오를 총애하면서 추문이 생기자 부부는 곧 [[별거]]하게 되었다. 결국 추문을 참지못한 단리 경이 메리의 면전에서 다비드 리치오를 끌어내서는 칼을 빼들어 무려 56차례나 찔러 죽이고 말았다. 이로 인해 메리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남편과의 사이는 확실히 틀어졌다. 그러다 1567년 봄에 화해하여 메리 1세가 단리 경을 [[별장]]으로 불러 오붓한 [[시간]]을 보냈는데, 여왕이 공교롭게 외출한 사이 별장이 폭파되고 단리 경은 교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끔찍한 사건의 진상은 자신이 총애하던 리치오가 살해당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메리 1세가 야심만만한 보스웰 백작을 새로운 정부(情夫)로 삼고, 여왕의 [[복수]]와 [[국서]](King Consort)를 살해하여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해 실권을 쥐고 싶어한 보스웰 백작의 합작이었다. 단리 경의 살해 배후자인 보스웰 백작 제임스 햅번은 이후 메리 1세와 [[납치]]나 다름없는 [[동거]]에 들어간 뒤, 기어코 메리 1세와의 결혼을 감행했고, 그녀는 곧 보스웰의 아이까지 [[임신]]했다. 더 웃긴 건 당시 메리는 말할 것도 없고 '''보스웰 백작도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것.'''[* 메리와 결혼하기 20일 전에 [[이혼]]했다고 한다.] 아무리 여왕이라고 해도 [[아내]]가 정부와 [[간통]]하여 [[남편]]을 모살한 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질만큼의]] 충격적인 파급력이었다. 게다가 당시 존 녹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엄숙한 [[청교도]] 신앙이 이미 스코틀랜드에 깊게 퍼졌기 때문에 가뜩이나 남편 단리 경의 살인을 공모했다고 의심받고 있던 차에, 남편을 살해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보스웰 백작과 결혼까지 하며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린 메리 1세는 자신의 지지자인 가톨릭 교도들에게까지 해명을 요구받으며 버림받았다. 결국 메리는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에게 붙잡혀 감금된 뒤 [[양위]]를 강요당했고, 당시 생후 10개월밖에 안된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폐위당했다. 감금 중에 보스웰의 아이를 [[유산]]한 메리는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군사들을 끌어 모아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에게 맞서 다시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패배하고 스코틀랜드를 떠날 처지가 된다. 메리는 그나마 왕래가 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죄수 신분으로 전락해 약 19년간 감금 생활을 하다 결국 1587년 [[처형]]되었다.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는 어머니의 양위로 생후 10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는데, 1603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로 지정되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헨리 8세]]의 직계가 모두 단절되었기 때문에 시조인 헨리 7세의 후손을 찾아야 했고,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 왕비가 되어 그 후손이 제임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기 수십 년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은 후계 지명 이야기만 나오면 벌컥 화를 냈지만 혈통상으로 제임스가 가장 우선인 건 그당시 신하들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개신교]] 군주 중 잉글랜드와 가장 밀접하고, 종교개혁을 잉글랜드보다 더 철저히 한 곳이 스코틀랜드라 잉글랜드의 신하들도 납득을 했다. 이렇게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까지 얻게 되면서 스튜어트 왕조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통합 왕조가 되었는데 그가 영국의 [[제임스 1세]]이다. ~~[[새옹지마]]~~ 거기에 [[웨일스]]와 [[아일랜드 왕국|아일랜드]]까지 얻어 제임스 1세는 [[브리튼 섬]]과 그 일대 전체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의 조상들은 몇 명이나 잉글랜드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는데 황당하게도 그 후손에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찰스 1세]] 때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으로 일시적으로 영국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나, [[찰스 2세]] 시대에 복위하였다. 하지만 [[제임스 2세]]가 딸 [[메리 2세]]와 사위 [[윌리엄 3세]]에 의한 [[명예혁명]]으로 쫓겨나면서 직계가 단절되었고, 메리 2세의 뒤를 이은 [[앤 여왕]]이 죽으면서 영국에서의 스튜어트 왕조는 [[영국사|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왕조는 독일계의 [[하노버 왕조|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왕조]]였다. 사실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의 후손들이 [[루이 14세]]의 지지하에 영국의 왕위를 요구하며 [[자코바이트]] 운동을 일으켰지만 이쪽도 결국 단절되면서 애매모호하게 끝났다. 다만 스튜어트 왕가가 단절됐을 뿐 이와 별개로 찰스 2세의 [[서자]]들은 [[공작(작위)|공작]] 작위를 받아 현재도 그 후손들이 영국 스튜어트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단지 서자의 후손인 관계로 왕위계승권이 없어서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되었더라도 스코틀랜드 클랜의 특성상 분가가 매우 많아 가문의 혈통은 적서 모두 포함해서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다. 왕조 단절 이후 스튜어트 가문을 대표하는 수장은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갤러웨이의 스튜어트 가문이 최선임으로(수장이 아니라 원로격)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